"지금 제가 하는 일의 최소 50%는 가상화폐 분야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차남 에릭 트럼프는 최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부동산 투자로 막대한 부를 쌓아온 트럼프 일가의 자산 축이 가상 자산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 중심에는 지난 1일(현지시간) 세계 주요 가상화폐 거래소에 상장한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 토큰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WLFI 발행으로 트럼프 일가 자산 가운데 가상 자산 비중이 이미 부동산을 넘어섰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WLFI는 미국의 디지털 달러 패권 강화라는 큰 명분으로 등장했다. 다만 세간의 주목을 끈데는 프로젝트 자체보다 트럼프의 존재가 더 크게 작용했다. WLFI는 비트코인 채굴사부터 투자사까지 아우르는 트럼프 일가의 '크립토 왕국'에서 탄생한 프로젝트다. 트럼프의 투자 사업과 긴밀하게 엮여있어 WLFI 자체보단 배후의 트럼프에 의해 운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WLFI는 트럼프 일가의 가상화폐 기업인 월드리버티파이낸셜이 발행한 토큰이다. 미국 달러의 글로벌 기축통화 지위를 탈중앙화(Defi·디파이)된 방식으로 강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디파이 철학에 따라 WFLI의 운영과 전략은 보유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WLFI의 발행 한도는 1000억 개다. 이번에 발행된 물량은 총 246억 6000만 개로 △월드리버티파이낸셜 100억 개 △블록체인 기업 'Alt5 시그마' 77억 8000만 개 △유동성과 마케팅 용도 28억 8000만 개 △대중에 공개된 물량 약 40억 개 등으로 할당됐다. 유통량을 최소화한 것으로 WLFI는 향후 보유자들의 투표를 통해 점진적으로 공급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월드리버티파이낸셜은 WLFI의 생태계 안정을 위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USD1도 선보였다. USD1을 활용한 크로스체인 결제와 유동성 제공은 WLFI의 유용성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다. 다만 WLFI의 구체적인 활용도와 수익 모델은 발행사 측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관리하고 있어 시장에서는 해당 프로젝트의 실체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WLFI는 트럼프 후광에 힘 입어 상장 첫 날 화려하게 데뷔했다.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WLFI는 상장 직후 0.46달러까지 오르며 전체 가상자산 시가총액 20위권에 등극했다. 초기 공모가인 0.015달러와 비교하면 30배 이상 높은 수치다. 15일 오전 6시 30분 현재 0.21달러에 거래되며 다소 열기가 식었지만 여전히 시가총액 52억 달러 규모로 28위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의 행운이 따르고 있지만 트럼프의 존재는 WLFI에 가장 큰 리스크이기도 하다. WSJ 보도에 따르면 WLFI 전체 물량 중 트럼프 일가 및 관계자가 보유한 물량은 전체 1000억 개 가운데 약 225억 개로 알려졌다. 가치로 따지면 50억 달러에 달한다. WLFI는 초기 물량을 제외하고 나머지 물량을 잠금해 놓은 상태다. 즉 유통량이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대규모 물량을 들고 있는 트럼프 일가의 행보에 따라 가격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WLFI 수익 대부분이 트럼프 연계 기관으로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투자자 가치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WLFI 지배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DT Marks DEFI LLC'로 월드리버티파이낸셜의 지분 약 40%를 보유하고 있다. 로이터는 "DT가 월드리버티파이낸셜 수익의 대부분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DT가 WLFI 토큰 매출의 75%를 가져가는 구조"고 전했다.
WLFI를 둘러싼 트럼프의 가상 자산 연계 기관은 DT뿐만이 아니다. 수익의 대부분이 귀속되는 모회사격 DT를 비롯해 15억 달러를 조달해 WLFI를 대량 매수한 ALT5 시그마, 나스닥에 상장한 비트코인 채굴기업 아메리칸비트코인(ABTC) 등도 모두 트럼프 일가가 창업했거나 이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가상 자산 관련 기업이다. 일각에서는 ALT5 시그마가 추가로 WLFI 매입하고 ABTC에서 채굴된 비트코인도 WLFI 생태계로 유입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결국 WLFI는 자체 유동화 정책보다도 트럼프 가문의 자산 전략이나 정책 추진 동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미 미국 정치권에서는 WLFI가 거래소에 상장하자 전례 없는 이해 충돌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엘리자베스 워런(민주당) 상원의원은 "대통령 일가의 금전적 이해관계가 가상화폐 규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놨다. 홍성욱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대통령 일가의 영향력으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모습이 디지털 자산 산업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박민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