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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라플라스의 마녀"는 행복을 줄까?...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속의 과학기술

Summary

*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공학도였다.

* 그의 소설에는 첨단 기술과 과학자가 자주 등장한다.

* 라플라스 시리즈는 "미래(운동) 예측"을 모티브로 한다

* 데이터 과학이 인간의 감동 패턴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콘텐츠는 input 홈페이지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input은 콘텐츠와 모임을 통해 혁신 기술을 이야기합니다.]
쇼핑몰 3층 난간에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입에 담배를 물었네요. 아이들도 많은데 이런 몰상식한...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지 정신이 없군요. 1층에서 사내를 흘겨보는 소녀가 있습니다. 헬륨을 넣은 풍선을 들고 있다가 놓아버립니다. 스르륵. 풍선이 비스듬하게 날아 오르는군요. 펑. 담뱃불에 닿아 풍선이 터집니다. 깜짝 놀란 사내가 놓친 스마트폰은 1층 바닥에 떨어져 부서집니다. “아, 고소해.”

일본 최고 작가 중 하나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주인공 소녀 마도카는 ‘마녀’입니다. 그 능력을 잠깐 볼까요.

볼링장입니다. 프로들은 공의 움직임을 보고 스트라이크인지 아닌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마도카는 스트라이크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물론 핀이 몇 개 남을 것인지도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분 단위로 날씨도 예측합니다. “우산은 필요 없어요. 우리가 차에 탄 후에 비가 올거에요.” 이런 식입니다. 마도카가 등장하는 다른 소설 ‘마력의 태동’에서는 스키 점프 선수의 비행 거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알아맞히기도 합니다.

마도카는 정말 미래를 예언하는 마녀일까요? 게이고는 마도카의 마법을 과학 이론에 따른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라플라스의 악마론,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공학을 전공한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기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30년 넘게 80편 이상 소설을 썼는데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0년간 최고의 베스트샐러 작가 입니다. 책을 냈다하면 수 십 만 권씩 팔립니다. 중국에서도 외국 작가 중 인세를 가장 많이 받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물리학자, 뇌과학자, 수학자, 로봇 공학자 등이 종종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진 ‘용의자X의 헌신’에는 천재 물리학자가 탐정, 천재 수학자가 범인입니다.

데뷰 30년 기념작인 라플라스 시리즈(‘라플라스의 마녀’와 그 프리퀄인 ‘마력의 태동’)에는 천재 뇌과학자와 지구 과학자가 나옵니다. 생소한 과학 이론과 기술을 모티브로 했지만, 소설 자체는 술술 읽힙니다.

라플라스 시리즈에 나오는 라플라스의 악마론은 뉴턴 역학에 바탕을 둔 기계론적 우주론이고,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은 유체 역학 방정식입니다. 사실 게이고는 이런 어려운 말은 쓰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나오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도 과학 용어는 거의 없습니다. 소설 전체에서 한 두번 정도 언급 되죠.

게이고의 신묘한 재주는 과학 기술을 소설 속 등장 인물의 희로애락과 잘 버무리는데 있습니다. 주인공은 과학 기술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요. 소설은 그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모든 데이터가 완벽하면 미래를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게이고 소설 속의 과학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일단 라플라스 시리즈의 마녀 마도카로 돌아가보죠.

마도카는 주변 공기의 흐름, 온도, 지형 등을 순간적으로 읽어 냅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언제, 어디서 풍선을 날려야 담뱃불에 정확하게 도달할 지를 계산합니다. 볼링 핀 예측도 마찬가지 입니다. 볼러의 움직임, 공의 무게, 회전, 플로어의 마찰 등 온갖 데이터를 읽고 물체(볼링 공과 핀)의 운동을 판단하는거죠.

소설에는 단 한 줄도 언급이 없지만 마도카의 이런 능력은 뉴턴 운동법칙으로 설명이 되기는 합니다. 소설 제목인 라플라스는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요. 그는 “전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의 운동 데이터가 있다면 나는 우주의 미래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라플라스의 악마론입니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marquis de Laplace 1749~1827년) 초상화

주사위를 던져서 어떤 숫자가 나올 것인지 예측하려면 주사위의 움직임에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뉴턴 운동 방정식에 넣으면 된다고 본 겁니다. 진짜 그럴까요? 이론적으로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방대한 데이터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죠?

라플라스는 완벽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악마’로 가정한 것인데요. 소설에서는 마도카가 그런 존재입니다. 마도카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됐느냐. 이건 강력한 스포인데요. 마도카의 아버지가 천재 뇌과학자여서 그런 능력을 우연치 않게 얻게 됩니다.

정답에 아주 가까이 가기만 해도 된다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 어려운 얘기를 장황하게 떠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라플라스의 악마론은 200년전 이론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현실에서는 ‘모든’, ‘완벽한’ 데이터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근사적으로, 최대한 데이터를 모으면,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겠다 정도로 타협(?)을 했죠.

실제로 기술자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근사적으로 답을 찾는 것에 익숙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입니다.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클로드 루이 나비에(Claude-Louis Navier 1785~1836)와 조지 스토크스(George Stokes 1819~1903)가 만든 유체 역학 방정식

이 방정식은 라플라스의 후배라고 할 수 있는 클로드 루이 나비에, 조지 스토크스 두 명의 과학자가 19세기에 만든 것인데요. 뉴턴 방정식을 물, 공기, 기름과 같은 유체에 적용한 것입니다. 방정식 자체는 무슨 암호같죠. 게이고는 라플라스 시리즈에서 이 방정식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도카가 날씨를 예측하고, 마도카의 능력을 갖게 만든 토네이도(돌개바람) 사건의 배후에 이 식이 있다고 언급하는데 그칩니다.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은 물, 바람 등 유체와 관련된 분야에서는 필수인 비선형 방정식입니다. 방정식이라는 말도 골치가 아픈데, 비선형? 아무튼 엄청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학적으로도 아직 완벽한 답이 없습니다.

이 방정식은 정답에 아주 가까운, 근사적인 답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근사적 답이지만 이걸로 수 백 명을 실어 날으는 비행기, 대양을 항해하는 수 천 톤 짜리 화물선을 설계합니다.

방정식 자체를 근사적으로 풀어도 쓰임새가 있다면 데이터를 최대한 모아서 정답에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간다면 활용도가 더 커지지 않을까요? 여기서 현대 데이터 과학이 라플라스의 악마를 다시 불러냅니다.

구글, 아마존, 네이버, 카카오. 이런 초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수 천 만, 수 억 명의 사용자 데이터를 모으는 이유를 짐작하실 수 있겠죠. 라플라스의 악마론을 다시 쓰면 이렇게 될 겁니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고로 이번 여름에 할 일도 알 수 있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행복할까?
게이고가 참 대단한 것이 이런 난해한 이론을 모티브로 400페이지 짜리 소설 책을 쓰는데,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마도카의 비범함 만큼이나 게이고의 글쓰기 신공이 놀랍습니다.

게이고는 소설에서 과학 기술이 아니라 ‘사람 사는 얘기’에 주력 합니다. 라플라스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블의 슈퍼 영웅만큼 엄청난 능력이죠. 그걸로 자연 재해 예측, 인류의 복지 증진과 같은 거대 담론을 떠들까요? 전 우주의 생명을 구하는 어벤저스의 일원?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마도카는 자신의 힘을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사에 도움을 주는데 씁니다. 예를 들면 아들을 위해 신기록을 내고 싶은 스키 점프 선수, 마구를 받아 줄 후배를 격려하는 야구 선수, 장애가 있는 아들을 수난 사고로 잃은 선생님, 불의의 사고로 애인을 떠나보낸 천재 음악가.

게이고는 사연 하나 하나를 마도카의 능력과 조합해서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능숙한 솜씨로 ‘감동’을 직조해냅니다. 저절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죠.

데이터 분석으로 내가 이번 여름에 어떤 수영복을 살 것인지 아마존 상품 판매 알고리즘이 예측했다고 해보죠. 마도카처럼요. 아마존은 인공지능(AI) 스피커 알렉사를 이용해서 은연 중에 그 상품을 저한테 노출시키겠죠. 어쩌면 저는 그 수영복을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구매 행위가 저한테 정말 행복감을 줄까요?

아니면, 마도카 같은 귀여운 여동생과 함께 “이 수영복이 어울려, 아니야 저게 유행이야, 친구가 비슷한 걸 샀어”, 온갖 수다를 떨면서 쇼핑몰을 몇 시간 씩 돌아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을까요?

데이터 분석 기술이 앞으로는 우리의 감동 패턴을 찾아 ‘예측된 감동’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라플라스 마녀(거대 플랫폼 기업)는 지금 이 시간에도 수정 구슬(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Editor‘s Comment
히가시노 게이고는 언론 인터뷰를 잘 하지 않습니다. 일본 주간문춘에서 1999년 10월 28일 인터뷰 기사를 냈는데요. 그 내용 일부가 주간조선에 인용된 것이 있더군요. 게이고도 처음부터 인기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시행 착오도 많았구요. 그러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경 썼던 점이었다. 박보장기 같은 소설을 쓰고 어떠냐며 으스댔다. 그런 내 작품을 일부 독자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들은 내 소설에 감탄은 해도 감동은 받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재미있는 것이다. 내가 그걸 깨달은 것은 데뷔하고도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과학적인 논리에 설득 당하는 것 같은데 실제 행동이나 감동을 받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라는 거죠. 게이고는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지 간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이런 소설을 쓰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James Jung기자 jms@decenter.kr

정명수 기자
jms@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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