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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터 용어사전⑦]비탈릭 부테린, '천재'vs.'외계인'? 가격보다는 가치 중시



어느 책에 나온 한 사람의 고백이다.

“내가 사업을 하면서 가장 비싼 수업료를 낸 분야가 의사결정이다. 중요한 결정을 위해 숙고를 거듭하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청취한다. 그런데도 결과가 좋지 않은 선택을 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날이 많았다.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운 일일까? 마침내 나는 알게 됐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의사결정을 내릴 때 가능한 1:1 대화보다는 의견이 다른 다수의 사람을 모아 놓고 문제를 논의하게 하라. 둘째,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라. 금융 분야에서 일하는 내 경우에는 컴퓨터 공학, 암호학, 경제학, 정치학 등 기타 사회과학 분야에서 일한 사람들과 의논을 나눈다. 마지막으로 결정은 당신이 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책임을 1%라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순간, 당신은 실패한 결정보다 더 큰 것을 잃을 것이다” (팀 패리스가 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중에서)

1994년생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한 말이다. 한국 나이로 만 24살의 젊은 청년이 보여준 통찰력은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항간에 천재라고 일컫는 얘기도 빈말은 아닌 듯 하다. 해외 암호화폐 업체인 비더모스 거래소가 블록체인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5명 중 한 명으로 부테린을 꼽았다. 부테린 외에 선정된 인물로는 글로벌 IT 보안 기업 맥아피 설립자 존 맥아피(John McAfee), 비트코인닷컴 대표 로저 버(Roger Ver), 바이낸스 CEO 자오 창펑(Zhao Chengpeng),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 등이다. 선정 기준이 절대적이진 않지만, 부테린의 영향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부테린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업계에서 큰 획을 그었다.

비트코인이 ‘화폐냐 아니냐’는 논란이 퍼지는 어수선한 사이에 P2P(개인간거래) 전자 화폐 시스템을 넘어선 개념을 들고 나왔다. 이른바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이란 개념으로 블록체인 2.0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간단히 설명하면 ‘비트코인의 결제네트워크 기능을 갖춘 동시에 분산화된 P2P 네트워크 안에서 실행되는 분산 애플리케이션(DApp)을 구현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뜬금없이 이더리움을 들고 나온 건 아니다. 부테린과 그 주변인이 얘기를 모아보면 이렇다.

1994년 1월 12일 러시아 모스크바 남동쪽으로 약 100㎞ 떨어진 콜롬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는 캐나다 토론토로 이사했다. ‘외계인’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부테린은 어릴 때부터 수학과 프로그래밍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4살 때 이미 엑셀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뤘고, 7살 때는 ‘토끼 백과사전’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 10살이 돼서는 아예 직접 코딩해 간단한 온라인 게임을 만들 정도가 됐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란 게임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다 게임 제작사 블리자드가 캐릭터가 지난 기능을 없애자 비탈릭은 중앙집권적 서비스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게임을 접는다.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부테린은 2011년 비트코인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정표로 삼는다.

부테린은 비트코인에 푹 빠져든다. 캐나다 명문대학인 워털루 대학교에서 비트코인 커뮤니티까지 만들어 활동했지만, 새로운 크립토 프로젝트를 만들겠다며 2014년 대학을 중퇴한다. 든든한 아버지의 믿음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한 아버지 드미트리 부테린은 “아들이 대학을 계속 다니면 애플이나 구글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학교를 그만두면 더 많은 걸 배우고 도전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조언했다”고 말했다.

사실 중퇴하기 몇 년 전부터 학교에 뜻이 없었다. 2011년 여행을 떠난다. 미국,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 발길 닫는 곳이면 어디든 다녔다. 그러다 비트코인 관련 블로그 운영자를 만났다. 그는 비트코인 관련 글을 올리면 비트코인 5개를 보상해주는 식으로 블로그 콘텐츠를 꾸려갔다. 같은 해 9월엔 비트코인 매거진을 만들고, 글을 썼다.

대망의 ‘이더리움’은 그로부터 2년 후인 2013년 말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이더리움 백서도 숱한 수정과 검증 과정을 거쳤다. 세상에 빛을 본 건 몇 달 후인 2014년 1월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북미 비트코인 콘퍼런스에서였다. 석 달 후인 4월 개빈 우드 박사(Dr. Gavin Wood)가 기술적으로 세부 내용을 담은 이더리움 옐로 페이퍼를 발표했다.

재단 설립에도 속도를 냈다. 같은 해 6월 부테린은 동료 개발자들과 함께 스위스 주크시에 이더리움 재단을 만들었다. 7월부터 이더리움은 프리세일(사전판매)을 시작해 42일 동안 했다. 이때 재단은 이더리움은 시장에 6,010만2,216개의 이더리움을 팔아 비트코인 3만1,591개를 받았다. 당시 시세로 1,800만 달러(약 2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수년간 이더리움은 화폐 거래를 넘어 새로운 플랫폼을 지향했고, 많은 블록체인 회사들이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ERC20(Ethereum Request for Comment 20) 토큰을 만들었다.

부테린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천재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름 업계에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암호화폐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에겐 찬물을 끼얹는다. “앞으로 급등사태는 없다”며 투기세력을 밀어내면서 한편에선 ‘탈중앙화’ 철학을 잃지 말자는 ‘초심 지키기’를 강조한다. 다음은 이더리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디센터유니버시티·보스코인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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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호 기자
derrid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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